2018년 10월 8일 월요일
뭣하러 시간 낭비를 했을꼬?
뭣하러 시간 낭비를 했을꼬?
젊은 청년은 아니라도 아직 기운이 있는 나이였으니까
주짓수를 배우던가 극진이나 무에타이를 배우던가 하면 좋았을 것을 말이다.
무엇에 혹해서 태극권을 배우는 데에 몇 년이나 시간을 낭비했을까?
그것도 고작 건강체조 수준 밖에는 배우지도 못하고 말 것을 말이다.
그런 정도는 나이 먹고 체력이 딸리는 시기에 배워도 될 것을 말이다.
나야 말로 인생을 낭비하고 말았구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여!
명문정파의 후계자인 사람이면 당연히 실력자일 거라 속단하지 말고,
간판 없는 잡종 무술이라고 하여 편견을 가지고 얕잡아 보지 말아라.
무술의 목적은 분명하니 오직 실력만을 보아야한다.
실력이 있는 사람, 나를 실력자로 만들어 줄 있는 사람이 최고의 스승이다.
무술가 박종관씨가 독고다이로 정진하는 이유를 알겠고 존경스럽다.
2018년 6월 26일 화요일
내가 정말로 사람을 잘못 보았군
우리 문화에서 보통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 선물을 한다.
생일선물부터, 식사대접에, 잡일을 거들고, 개인적인 충고까지.
모두 선물이고 선의로 주는 행동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니까 윗사람은 선물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아랫사람으로부터라도 선물을 받았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용도가 있는 선물이라면 당연히 용도에 맞게 사용하려고 노력해 주어야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한 예의이다.
그런데 용도가 확실한 선물을 받고서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장식품으로 전락시켜 놓는다면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극심한 모욕을 당했다.
내가 정말로 사람을 잘못 보았군.
생일선물부터, 식사대접에, 잡일을 거들고, 개인적인 충고까지.
모두 선물이고 선의로 주는 행동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니까 윗사람은 선물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아랫사람으로부터라도 선물을 받았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용도가 있는 선물이라면 당연히 용도에 맞게 사용하려고 노력해 주어야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한 예의이다.
그런데 용도가 확실한 선물을 받고서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장식품으로 전락시켜 놓는다면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극심한 모욕을 당했다.
내가 정말로 사람을 잘못 보았군.
2018년 5월 8일 화요일
2016년 12월 5일 월요일
찻잔의 무게
오래 전에 선문답을 들었다. 어느 선사가 다른 선사를 찾아왔다. 선사가 불법이 행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다른 선사는 대답으로 찻잔을 옆으로 옮겨 놓았다. 그렇다면 불법이 이루는 바는 무엇이냐고 물으니 다시 찻잔을 제자리에 옮겨 놓았다. 선사들의 이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들은 선문답이였다.
그후에 나는 생전의 조셉 캠벨이 신화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대중 강의를 하는 것을 국내 방송을 통해 보았고 사후에도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조셉 캠벨의 이름이 붙은 책은 모조리 사들여 읽었다. 조셉 캠벨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C.G. 융의 분석심리학에도 매료되었다. 조셉 캠벨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소리를 듣고선 난해하기로 소문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으려고 하다가 불과 몇 쪽도 읽지 못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는 짓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예고도 없이 오래 전에 들은 선 이야기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뛸듯이 기뻤다. 내가 그 뜻을 깨치다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그런데 기쁨은 잠시이고, 며칠 만에 내 깨달음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진정 깨달음을 얻었다면 열반에 들어 해탈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쳇바퀴 하나를 굴리는 지겨운 인생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분명히 선문답의 뜻을 맞추었는데 왜 해탈하지 못하는 것일까.
알고 보니 그 선문답은 쉬운 편이었다. 화두에 높고 낮음이 있을까 싶지만. 알고 보니 승가대학의 출가자 중에서도 뜻을 알아채는 자가 많은 것이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쉽게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지득(知得)에 그치고 체득(體得)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생각해 보니, 그동안 탐닉했던 책에서 조셉 캠벨이 수없이 반복하여 알려주었던 원형적 신화의 뜻과도 다름이 없었다. 나는 여태껏 선문답의 답을 책으로 읽으며 감탄하고 있으면서도 깨우치지 못했고, 깨우친 것도 겨우 선문답의 논리구조만 깨달은 지득에 그쳤을 뿐이었다. 찻잔을 옮긴다는 의미만 알았을 뿐, 나는 아직 찻잔을 움켜쥐고 있기만 한 것이다. 내가 찻잔을 옮길 수 있을까? 찻잔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후에 나는 생전의 조셉 캠벨이 신화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대중 강의를 하는 것을 국내 방송을 통해 보았고 사후에도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조셉 캠벨의 이름이 붙은 책은 모조리 사들여 읽었다. 조셉 캠벨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C.G. 융의 분석심리학에도 매료되었다. 조셉 캠벨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소리를 듣고선 난해하기로 소문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으려고 하다가 불과 몇 쪽도 읽지 못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는 짓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예고도 없이 오래 전에 들은 선 이야기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뛸듯이 기뻤다. 내가 그 뜻을 깨치다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그런데 기쁨은 잠시이고, 며칠 만에 내 깨달음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진정 깨달음을 얻었다면 열반에 들어 해탈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쳇바퀴 하나를 굴리는 지겨운 인생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분명히 선문답의 뜻을 맞추었는데 왜 해탈하지 못하는 것일까.
알고 보니 그 선문답은 쉬운 편이었다. 화두에 높고 낮음이 있을까 싶지만. 알고 보니 승가대학의 출가자 중에서도 뜻을 알아채는 자가 많은 것이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쉽게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지득(知得)에 그치고 체득(體得)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생각해 보니, 그동안 탐닉했던 책에서 조셉 캠벨이 수없이 반복하여 알려주었던 원형적 신화의 뜻과도 다름이 없었다. 나는 여태껏 선문답의 답을 책으로 읽으며 감탄하고 있으면서도 깨우치지 못했고, 깨우친 것도 겨우 선문답의 논리구조만 깨달은 지득에 그쳤을 뿐이었다. 찻잔을 옮긴다는 의미만 알았을 뿐, 나는 아직 찻잔을 움켜쥐고 있기만 한 것이다. 내가 찻잔을 옮길 수 있을까? 찻잔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2016년 1월 31일 일요일
보조 운동이 잔재주라고?
무술도 운동의 효과를 높이려면, 전래되어 오는 훈련법이나 현대 과학으로 적합하게 개발된 보조적인 운동법을 많이 하는 것이 효과가 있음을 깨닫고 이런 보조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자고 인터넷 게시판에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보조적인 운동은 잔재주에 불과하다는 공격적인 반응을 받았다. 그런 것은 무술이란 운동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것일 뿐이니 너무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는 반박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유명한 무술 연구가가 공력단련에 촛점을 맞춘 책을 써냈다. 그리고 평소에도 여러 가지 신체 단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아무도 반박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같은 말을 해도 만만한 놈의 말이면 무시하고, 인정받는 선배의 말이면 수긍하는, 어이없는 반응이었다.
복싱 선수가 로드웍을 하지 않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스피드볼처럼 가벼운 것을 치는 목적이 있지 않은가? 무거운 해머를 장작을 패듯이 휘두르면 펀치가 강해진다는 것은 효과가 입증된 복싱의 보조운동이다. 이런 거 다 제쳐 놓고서 죽어라 샌드백만 치다가 링에 올라가면 된다는 것인가.
동양 무술에도 효과가 검증된 보조운동이 많이 있다. 마보참장은 기본이고, 매화장 수련은 하체를 굳건하고 안정되게 해주고, 연무석을 드는 훈련은 양로선도 했었다는 수련법이다. 사량발천근이라는 내가권에서도 그 비결이 옛날에는 단전이라고 부르던 코어의 강력하고 순간적인 움직임과 그 힘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지체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코어를 빠르고 강력하게 단련하는 방법과 코어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수행할 수 있는 단련법들이 개발되고 수행되고 있다. 그것만인가. 파워는 생기겠지만 실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간합과 타이밍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으로 정해진 약속대련인 포나 대타라고 불리는 약속대련부터 시작하여 점점 변화를 주고 자유도를 높이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보조적인 훈련없이 무술다운 무술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이런 게 모두 잔재주라는 폄하하는 사람은 무슨 훈련을 할까? 특히 중국무술은 투로 위주이니까 전통으로 내려온 투로만 수련하면 충분하다는 말일까? 흔히 전통 혹은 정통이라 불리는 투로 속에는 무슨 비밀이라도 있어서 천번 만번을 수련하면 어느 순간에 신비한 능력이라도 생긴다는 말인가.
무술은 생명체처럼 진화한다. 과거에 있던 무술을 배운 사람이 장단점을 개선하여 새로 창안하여 가면서 무술은 기법만 진화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단련법도 진화된 모양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더구나 현대 과학이 개발하고 효과가 입증된 단련법이 나에게 소용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무시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것들도 역시 시간이 오래 지나면 전통의 일부로 포함될 것이다.
이런 꽉 막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변화하지 않는다. 아니, 변화를 거부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변화는 순수한 혈통의 파괴일 뿐이며, 무술 수련의 올바른 방법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그들이 불변의 진리라고 믿는 것도 실제로는 오랜 시간 속에서 수많은 변천과정을 거치며 형성된 것이지, 모세의 십계명처럼 신이 하늘에서 내려준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가장 현실적인 운동인 무술이란 것을 하면서,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고집하려는 자기 모순을 왜 깨닫지 못할까?
그런데 나중에 유명한 무술 연구가가 공력단련에 촛점을 맞춘 책을 써냈다. 그리고 평소에도 여러 가지 신체 단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아무도 반박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같은 말을 해도 만만한 놈의 말이면 무시하고, 인정받는 선배의 말이면 수긍하는, 어이없는 반응이었다.
복싱 선수가 로드웍을 하지 않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스피드볼처럼 가벼운 것을 치는 목적이 있지 않은가? 무거운 해머를 장작을 패듯이 휘두르면 펀치가 강해진다는 것은 효과가 입증된 복싱의 보조운동이다. 이런 거 다 제쳐 놓고서 죽어라 샌드백만 치다가 링에 올라가면 된다는 것인가.
동양 무술에도 효과가 검증된 보조운동이 많이 있다. 마보참장은 기본이고, 매화장 수련은 하체를 굳건하고 안정되게 해주고, 연무석을 드는 훈련은 양로선도 했었다는 수련법이다. 사량발천근이라는 내가권에서도 그 비결이 옛날에는 단전이라고 부르던 코어의 강력하고 순간적인 움직임과 그 힘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지체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코어를 빠르고 강력하게 단련하는 방법과 코어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수행할 수 있는 단련법들이 개발되고 수행되고 있다. 그것만인가. 파워는 생기겠지만 실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간합과 타이밍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으로 정해진 약속대련인 포나 대타라고 불리는 약속대련부터 시작하여 점점 변화를 주고 자유도를 높이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보조적인 훈련없이 무술다운 무술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이런 게 모두 잔재주라는 폄하하는 사람은 무슨 훈련을 할까? 특히 중국무술은 투로 위주이니까 전통으로 내려온 투로만 수련하면 충분하다는 말일까? 흔히 전통 혹은 정통이라 불리는 투로 속에는 무슨 비밀이라도 있어서 천번 만번을 수련하면 어느 순간에 신비한 능력이라도 생긴다는 말인가.
무술은 생명체처럼 진화한다. 과거에 있던 무술을 배운 사람이 장단점을 개선하여 새로 창안하여 가면서 무술은 기법만 진화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단련법도 진화된 모양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더구나 현대 과학이 개발하고 효과가 입증된 단련법이 나에게 소용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무시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것들도 역시 시간이 오래 지나면 전통의 일부로 포함될 것이다.
이런 꽉 막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변화하지 않는다. 아니, 변화를 거부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변화는 순수한 혈통의 파괴일 뿐이며, 무술 수련의 올바른 방법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그들이 불변의 진리라고 믿는 것도 실제로는 오랜 시간 속에서 수많은 변천과정을 거치며 형성된 것이지, 모세의 십계명처럼 신이 하늘에서 내려준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가장 현실적인 운동인 무술이란 것을 하면서,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고집하려는 자기 모순을 왜 깨닫지 못할까?
Yoga only for women? Ashtanga Yoga
요즘 요가학원마다 인기있는 아슈탕가 요가란 무엇인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일단 구경이나 해보자.
이것이 아슈탕가의 가장 쉬운 난이도인 프라이머리(Primary) 시리즈이다. 보신 소감이 어떠신가? 하타비 조이스가 직접 지도 하는 가운데, 무려 1시간18분 동안의 강도높은 운동을 하니 제자들의 숨이 턱에 차고 체력 차이 때문에 일사분란한 시범은 보여주지 못 한다.
프라이머리가 가장 쉬운 것이며, 인터미디어트(Intermediate), 어드밴스(Advanced) A, B, C, D 총 6개의 시리즈가 있으며, 갈수록 동작은 힘들고 어려워진다. 요가를 여자들의 운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몸매나 가꾸겠다고 요가를 하는 여성들은 프라이머리 시리즈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 건강한 남자를 데려다 시켜도 힘들어서 눈앞에 별이 반짝일 지경인데 오죽하겠는가. 어드밴스 시리즈로 가면 웃기게 표현해서 발에 거의 땋게 닿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
아슈탕가 요가는 파타비 조이스(K.Pattabhi Jois)라는 사람이 창안한 빈야사이다. 아슈탕가 빈야사라고 불러야 정확한 명칭이다. 요가의 계열상 라자 요가에 속하며 당연히 라자 요가의 모든 공통점을 공유한다. 파타비 조이스가 만들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파타비 조이스가 만든 것이란 말도 틀린 말이다. 이미 아슈탕가의 원형은 시기를 알 수 없는 때부터 존재했으며, 파타비 조이스는 그것을 배워서 자신의 스타일로 변형한 것이다. 그리고 파타비 조이스가 마이솔에서 가르쳤으며 서양인 제자들에 의해 세계적으로 유행이 된 것이다. 파타비 조이스는 2009년 사망했다.
아슈탕가는 신체를 단련하는 요가인가? 아니다. 모든 요가는 신체와 정신을 함께 수련한다. 그것이 아슈탕가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이다. 아슈탕가라는 단어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훌륭한 요가를 만들겠다는 파타비 조이스의 평생의 연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모든 요가는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방편이다. 명상이 깨달음으로 직행하려른 방편이라면, 요가는 몸의 움직임이라는 가이드가 안내해 주는 방편인 것이다. 극기, 고생, 선행, 자선 등이 모두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고, 요가이다.
난 아직도 한국 안에서 어드밴스 D까지 모든 시리즈를 할 수 있는 요가 지도자가 있다는 소리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실력있는 아슈탕가 지도자라야 겨우 어드밴스 A 정도를 하는 수준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전국의 요가 학원에서는 아슈탕가 요가가 선풍적인 인기일까? 앞다투어 아슈탕가 클래스를 도입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인의 체력으로는 프라이머리를 완성하기도 힘든데 말이다. 프라이머리마저도 힘들어서 쉽게 변형해서 가르치는 곳이 비일비재한데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간단하다. 단조롭고 정적인 하타 요가에 수련생들이 지루해서 싫증을 내자, 빈야사 요가가 도입되었고, 아헹가 요가 등이 도입되었고, 마지막으로 아슈탕가라는 신제품으로 요가 수련생을 유혹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의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고통스럽고 지루한 방법보다는, 적당히 움직이면서 도전해 보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아슈탕가는 요가 산업계가 내놓은 최신예 신제품인 것이다. 이밖에도 플라잉 요가니 뭐니 재미있게 변형된 신형 요가가 수요자를 유혹하고 있다. 나는 아슈탕가를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아슈탕가를 받아들이는 한국의 수련자와 지도자의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요가는 분명히 대단히 종교적인 수련법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런 걸 깡그리 무시하고 그저 운동효과만 얻으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는 모양만 요가일 뿐이지 피트니스나 필라테스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심신을 동시에 수련하려는 라자 요가에서 가장 기본적인 하타 요가를 무시한 요가는 있을 수가 없다. 아슈탕가 요가가 추구하는 것은 하타 요가에서부터 수백년, 수천년 동안 연구되고 수행되어 왔다. 아슈탕가란 단어의 뜻은 요가의 올바른 여덟가지 단계를 말한다. 그것은 하타 요가의 전통에서 이미 확립된 것이고, 아슈탕가는 그것을 이루려고 새로이 탄생한 빈야사인 것이다. 당신이 하타 요가의 아사나를 수련하든 아슈탕가의 빈야사를 수련하든, 결국 같은 목표점을 향하는 조금 다른 움직임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요가는 요가가 아니라 체조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요가에 관한 좋은 블로그를 소개한다. 직접 마이솔까지 요가 유학을 다녀오고 직접 체험하면서 요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인식을 가진 사람이다. 당신이 요가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선입견을 송두리째 박살낼 것이다. New Yogis - 요가 여행자의 삶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일단 구경이나 해보자.
이것이 아슈탕가의 가장 쉬운 난이도인 프라이머리(Primary) 시리즈이다. 보신 소감이 어떠신가? 하타비 조이스가 직접 지도 하는 가운데, 무려 1시간18분 동안의 강도높은 운동을 하니 제자들의 숨이 턱에 차고 체력 차이 때문에 일사분란한 시범은 보여주지 못 한다.
프라이머리가 가장 쉬운 것이며, 인터미디어트(Intermediate), 어드밴스(Advanced) A, B, C, D 총 6개의 시리즈가 있으며, 갈수록 동작은 힘들고 어려워진다. 요가를 여자들의 운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몸매나 가꾸겠다고 요가를 하는 여성들은 프라이머리 시리즈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 건강한 남자를 데려다 시켜도 힘들어서 눈앞에 별이 반짝일 지경인데 오죽하겠는가. 어드밴스 시리즈로 가면 웃기게 표현해서 발에 거의 땋게 닿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
아슈탕가 요가는 파타비 조이스(K.Pattabhi Jois)라는 사람이 창안한 빈야사이다. 아슈탕가 빈야사라고 불러야 정확한 명칭이다. 요가의 계열상 라자 요가에 속하며 당연히 라자 요가의 모든 공통점을 공유한다. 파타비 조이스가 만들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파타비 조이스가 만든 것이란 말도 틀린 말이다. 이미 아슈탕가의 원형은 시기를 알 수 없는 때부터 존재했으며, 파타비 조이스는 그것을 배워서 자신의 스타일로 변형한 것이다. 그리고 파타비 조이스가 마이솔에서 가르쳤으며 서양인 제자들에 의해 세계적으로 유행이 된 것이다. 파타비 조이스는 2009년 사망했다.
아슈탕가는 신체를 단련하는 요가인가? 아니다. 모든 요가는 신체와 정신을 함께 수련한다. 그것이 아슈탕가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이다. 아슈탕가라는 단어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훌륭한 요가를 만들겠다는 파타비 조이스의 평생의 연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모든 요가는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방편이다. 명상이 깨달음으로 직행하려른 방편이라면, 요가는 몸의 움직임이라는 가이드가 안내해 주는 방편인 것이다. 극기, 고생, 선행, 자선 등이 모두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고, 요가이다.
난 아직도 한국 안에서 어드밴스 D까지 모든 시리즈를 할 수 있는 요가 지도자가 있다는 소리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실력있는 아슈탕가 지도자라야 겨우 어드밴스 A 정도를 하는 수준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전국의 요가 학원에서는 아슈탕가 요가가 선풍적인 인기일까? 앞다투어 아슈탕가 클래스를 도입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인의 체력으로는 프라이머리를 완성하기도 힘든데 말이다. 프라이머리마저도 힘들어서 쉽게 변형해서 가르치는 곳이 비일비재한데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간단하다. 단조롭고 정적인 하타 요가에 수련생들이 지루해서 싫증을 내자, 빈야사 요가가 도입되었고, 아헹가 요가 등이 도입되었고, 마지막으로 아슈탕가라는 신제품으로 요가 수련생을 유혹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의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고통스럽고 지루한 방법보다는, 적당히 움직이면서 도전해 보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아슈탕가는 요가 산업계가 내놓은 최신예 신제품인 것이다. 이밖에도 플라잉 요가니 뭐니 재미있게 변형된 신형 요가가 수요자를 유혹하고 있다. 나는 아슈탕가를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아슈탕가를 받아들이는 한국의 수련자와 지도자의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요가는 분명히 대단히 종교적인 수련법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런 걸 깡그리 무시하고 그저 운동효과만 얻으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는 모양만 요가일 뿐이지 피트니스나 필라테스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심신을 동시에 수련하려는 라자 요가에서 가장 기본적인 하타 요가를 무시한 요가는 있을 수가 없다. 아슈탕가 요가가 추구하는 것은 하타 요가에서부터 수백년, 수천년 동안 연구되고 수행되어 왔다. 아슈탕가란 단어의 뜻은 요가의 올바른 여덟가지 단계를 말한다. 그것은 하타 요가의 전통에서 이미 확립된 것이고, 아슈탕가는 그것을 이루려고 새로이 탄생한 빈야사인 것이다. 당신이 하타 요가의 아사나를 수련하든 아슈탕가의 빈야사를 수련하든, 결국 같은 목표점을 향하는 조금 다른 움직임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요가는 요가가 아니라 체조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요가에 관한 좋은 블로그를 소개한다. 직접 마이솔까지 요가 유학을 다녀오고 직접 체험하면서 요가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인식을 가진 사람이다. 당신이 요가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선입견을 송두리째 박살낼 것이다. New Yogis - 요가 여행자의 삶
2015년 12월 1일 화요일
당신의 피트니스는 실패하고 만다
몸매에 관한 각종 수식어와 신조어가 남발하고,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도 근육질의 몸을 만들기에 열광이다. 매스미디어도 근육이 발달한 몸매를 찬양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몸매 만들기는 건강을 넘어 이제는 아름다움이고 몸매는 자기관리의 척도로 여겨지며 자기 자신에 대한 심리적 자존감마저 피트니스로 다져진 몸매만 있으면 쟁취할 수 있다는 맹신이 널리 퍼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근육질의 멋진 몸매를 가지고 뽐내려고 체육관에서 땀 흘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당신들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원하고 지나치게 높은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처럼 근육이 잘 생기지 않는다. 여성이 근육질 몸매를 가지려면 그야말로 보디빌딩 선수 수준의 운동량에다, 닭가슴살과 달걀 흰자와 방울토마토를 소금간도 없이 꾸역꾸역 먹어야 하며 빠르고 강한 효과를 원하면 단백질 보충제라는 것까지 먹어야 하니 그야말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하면 근육은 만들어질 것이다. 두어달은 멋진 몸매를 자랑하고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음부터이다. 그런 운동과 식생활을 평생 유지할 수 있느냐이다. 일반인 중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들 평소의 운동량과 식생활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때에도 근육질 몸매가 유지될 수 있는가?
피트니스 산업은 고객이 끊임없이 실패해야 유지되는 모양새가 되었다. 체육관에 등록하여 단기간 급격히 운동해서 근육을 만들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근육과 몸매는 시나브로 사라지고, 또다시 멋진 몸매를 아쉬워하며 다시 체육관에 등록하여 급격히 운동하여 근육과 몸매를 만들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결국 근육은 사라지고 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근육은 오랜 단련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니, 그 노력은 마땅히 찬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근육만이 건강이나 체력이나 몸매나 심지어 자존감마저 좌우하는 유일한 척도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체육관에 갈 일이 아니라 심리상담을 먼저 받아보기를 권한다. 자기가 남보다 자랑할 만한 것이 몸뚱아리 밖에 없다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란 말인가. 사실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왜 몸매를 남과 비교하려 하는가? 얼굴처럼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밖에 없는 몸매를 왜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서 스스로 열등감에 빠지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런 현상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벌써 선구적인 체육관들은 더 이상 겉으로 보이는 몸매에 신경을 쓰지 않기 시작했다. 평생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하는 몸이 제대로 균형있게 기능하느냐에 촛점을 맞추어 이제는 운동을 지도한다. 체육활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근골의 강인함과 내분비의 활성화와 운동의 쾌감이다.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어떤 운동이든 상관없다. 실제로 거의 모든 스포츠 종목은 이 목적을 달성해 준다. 건강한 몸매와 활기찬 마음은 저절로 따라온다. 여성에게 생리적으로 불리할 수 밖에 없는 근육 만들기는 나르시시즘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유행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여성은 요가 혹은 필라테스 같은 것만 해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평소에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아서 기초체력이 부족한 여성들이 입문하기 쉬운 종목일 뿐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체력과 운동능력은 노력하는 만큼 발달하게 되어 있으니 여성이라는 이유로 즐길 수 없는 스포츠 종목은 세상에 없다.
평소 일상에 스포츠를 즐겨라. 어느 종목이든 상관없다. 자신이 좋아하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만약 스포츠를 즐길 여가가 없다면 당신은 너무나 각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여성은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 여성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뿌리깊은 인습에 빠져있거나 매스미디어가 광고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동경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의 마음을 먼저 성찰해 보라.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원하고 지나치게 높은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처럼 근육이 잘 생기지 않는다. 여성이 근육질 몸매를 가지려면 그야말로 보디빌딩 선수 수준의 운동량에다, 닭가슴살과 달걀 흰자와 방울토마토를 소금간도 없이 꾸역꾸역 먹어야 하며 빠르고 강한 효과를 원하면 단백질 보충제라는 것까지 먹어야 하니 그야말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하면 근육은 만들어질 것이다. 두어달은 멋진 몸매를 자랑하고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음부터이다. 그런 운동과 식생활을 평생 유지할 수 있느냐이다. 일반인 중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들 평소의 운동량과 식생활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때에도 근육질 몸매가 유지될 수 있는가?
피트니스 산업은 고객이 끊임없이 실패해야 유지되는 모양새가 되었다. 체육관에 등록하여 단기간 급격히 운동해서 근육을 만들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근육과 몸매는 시나브로 사라지고, 또다시 멋진 몸매를 아쉬워하며 다시 체육관에 등록하여 급격히 운동하여 근육과 몸매를 만들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결국 근육은 사라지고 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근육은 오랜 단련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니, 그 노력은 마땅히 찬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근육만이 건강이나 체력이나 몸매나 심지어 자존감마저 좌우하는 유일한 척도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체육관에 갈 일이 아니라 심리상담을 먼저 받아보기를 권한다. 자기가 남보다 자랑할 만한 것이 몸뚱아리 밖에 없다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란 말인가. 사실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왜 몸매를 남과 비교하려 하는가? 얼굴처럼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밖에 없는 몸매를 왜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서 스스로 열등감에 빠지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런 현상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벌써 선구적인 체육관들은 더 이상 겉으로 보이는 몸매에 신경을 쓰지 않기 시작했다. 평생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하는 몸이 제대로 균형있게 기능하느냐에 촛점을 맞추어 이제는 운동을 지도한다. 체육활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근골의 강인함과 내분비의 활성화와 운동의 쾌감이다.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어떤 운동이든 상관없다. 실제로 거의 모든 스포츠 종목은 이 목적을 달성해 준다. 건강한 몸매와 활기찬 마음은 저절로 따라온다. 여성에게 생리적으로 불리할 수 밖에 없는 근육 만들기는 나르시시즘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유행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여성은 요가 혹은 필라테스 같은 것만 해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평소에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아서 기초체력이 부족한 여성들이 입문하기 쉬운 종목일 뿐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체력과 운동능력은 노력하는 만큼 발달하게 되어 있으니 여성이라는 이유로 즐길 수 없는 스포츠 종목은 세상에 없다.
평소 일상에 스포츠를 즐겨라. 어느 종목이든 상관없다. 자신이 좋아하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만약 스포츠를 즐길 여가가 없다면 당신은 너무나 각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여성은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 여성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뿌리깊은 인습에 빠져있거나 매스미디어가 광고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동경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의 마음을 먼저 성찰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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