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5일 월요일

찻잔의 무게

 오래 전에 선문답을 들었다. 어느 선사가 다른 선사를 찾아왔다. 선사가 불법이 행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다른 선사는 대답으로 찻잔을 옆으로 옮겨 놓았다. 그렇다면 불법이 이루는 바는 무엇이냐고 물으니 다시 찻잔을 제자리에 옮겨 놓았다. 선사들의 이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들은 선문답이였다.

 그후에 나는 생전의 조셉 캠벨이 신화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대중 강의를 하는 것을 국내 방송을 통해 보았고 사후에도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조셉 캠벨의 이름이 붙은 책은 모조리 사들여 읽었다. 조셉 캠벨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C.G. 융의 분석심리학에도 매료되었다. 조셉 캠벨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소리를 듣고선 난해하기로 소문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으려고 하다가 불과 몇 쪽도 읽지 못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는 짓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예고도 없이 오래 전에 들은 선 이야기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뛸듯이 기뻤다. 내가 그 뜻을 깨치다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그런데 기쁨은 잠시이고, 며칠 만에 내 깨달음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진정 깨달음을 얻었다면 열반에 들어 해탈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쳇바퀴 하나를 굴리는 지겨운 인생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분명히 선문답의 뜻을 맞추었는데 왜 해탈하지 못하는 것일까.

 알고 보니 그 선문답은 쉬운 편이었다. 화두에 높고 낮음이 있을까 싶지만. 알고 보니 승가대학의 출가자 중에서도 뜻을 알아채는 자가 많은 것이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쉽게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지득(知得)에 그치고 체득(體得)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생각해 보니, 그동안 탐닉했던 책에서 조셉 캠벨이 수없이 반복하여 알려주었던 원형적 신화의 뜻과도 다름이 없었다. 나는 여태껏 선문답의 답을 책으로 읽으며 감탄하고 있으면서도 깨우치지 못했고, 깨우친 것도 겨우 선문답의 논리구조만 깨달은 지득에 그쳤을 뿐이었다. 찻잔을 옮긴다는 의미만 알았을 뿐, 나는 아직 찻잔을 움켜쥐고 있기만 한 것이다. 내가 찻잔을 옮길 수 있을까? 찻잔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